<한국농정> 농민운동 현장을 찾아서-농민운동의 요람, 크리스천 아카데미(2016.1.11)
우리나라 농민운동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봉건 왕조 시대의 모든 봉기는 농민 봉기였으며 민족사에 우뚝한 동학농민혁명 역시 농민이 주체가 되어 싸운 일대 전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농민들은 적색농조를 조직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 조직과 열기는 해방 후에 전국농민조합총동맹(전농)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전농이 소속되었던 민족민주전선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농민운동은 거의 궤멸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하여 모든 민중들의 움직임을 빨갱이로 매도하여 탄압했고 그런 상황에서 농민운동은 싹조차 내밀 수 없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1970년대가 되어 박정희가 추구하는 공업화 전략은 농촌 사회의 급격한 몰락을 가져오는 정책임이 점점 명확해졌다. 폭압적인 통치 하에서 농촌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 피폐해 갔고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농민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 이후 가장 강력한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한 농민운동, 그 시작에는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 단체가 있다.
▲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말그대로 우리나라 농민운동가의 산실이었다. 1970년대 중반 수원에 위치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내일을 위한 집'에서 열린 '농촌지도자 지도력 개발과정 교육' 모습. (재)여해와 함께 제공 |
농민과 지식인의 만남
70년대에 농민운동을 시작하여 이후 운동의 주축이 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역도, 나이도 다르지만 그들 거의 모두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 이게 새 세상이구나, 그랬어요. 인생을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런 걸 크게 깨달았지요. 교육을 다 받고 나니까, 여기에 목숨을 걸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거예요. 뭐랄까, 결연한 의지가 생겼다고나 할까.”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2기로 교육받은 고성의 농민운동가 이호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한 자각은 교육을 받은 농민들 대다수가 마찬가지였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무려 800여 명의 농민들을 의식화시켜 자신의 고장에서 농민운동가로 거듭나게 했다. 엄청난 숫자였고 이후 들불처럼 타오를 농민운동의 밀알들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어떤 단체였을까.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기독교계에서 만든 사회교육 기관이다.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경동교회의 강원룡이었다. 기독교계에서 주도하였지만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종교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회교육 단체였다. 아카데미 헌장 1조는 이렇다.
‘본 아카데미는 한국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모든 문제를 조사 연구하며 대화를 통한 합리적인 해결에 이바지하기 위한 각종 협의회를 가지며 모든 분야에서 봉사할 일꾼을 훈련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대화가 중시되는 것은 이 운동이 처음 일어났고 한국의 아카데미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독일의 아카데미 운동과 관련이 있다. 사실 아카데미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대화, 혹은 토론을 뜻한다(크리스천 아카데미는 2000년 5월, ‘대화문화 아카데미’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들은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을 비인간화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빈부, 지배와 피지배, 도시와 농촌,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단절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양극을 해결하기 위해 중간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적인 존재를 양성하여 사회의 통합과 화해를 도모한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농촌과 산업, 노동의 세 분야로 나누어 교육을 진행하였으며 농촌 분야 간사는 이우재였다.
이우재를 비롯한 농촌분야 활동가들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일정하게 받아들인 진보적인 경제학도들이었다. 장상환, 황한식, 황민영, 권오승, 박진도, 민인기, 권영근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농민운동을 지향했던 젊은 학도들로 당시 유신정권의 폭압적인 상황에서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가능했던 의식화 운동이었다. 70년대의 운동은 종교라는 울타리가 불가피했다. 통혁당이나 인혁당에서 보듯이 이념적인 질식 상태에서 의식화 교육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열정에 찬 젊은 지식인들에게 운동을 위한 장으로서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틀이었다.
교육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독일 노동조합의 민주적 교육방법을 도입하여 참가자들이 분반토론, 5분 발언 등으로 능동적으로 발언하고 진행에까지 참여하도록 하였다. 교육은 1차와 2차, 그리고 장기 전문과정이 있었다.
▲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말그대로 우리나라 농민운동가의 산실이었다. 1970년대 중반 수원에 위치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내일을 위한 집'에서 열린 '농촌지도자 지도력 개발과정 교육' 모습. (재)여해와 함께 제공 |
농민운동가들의 탄생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내일을 위한 집’은 수원 시내와 뚝 떨어진 언덕에 위치해 있어서 마음껏 노래 부르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었다. 강의실과 식당, 화장실을 오가는 곳에 작은 원형 광장이 있어서 교육생들끼리 자연스럽게 만나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교육 참가자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불렀다. 어색하던 호칭은 뚜렷한 동질감을 심어주었고 나이에 관계없이 수평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었다. 농민들에게 충격과 의식의 전환을 주었던 4박5일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일정과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날, 개회 행사와 강원룡 목사로부터 ‘자유 평등 인간화’의 민주주의 이념과 ‘의식화 조직화 동력화’라는 강의를 듣는다.
둘째 날에는 농민이 가난한 이유와 농업문제의 본질 등에 대한 분반토의와 강의를 한다.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인식, 즉 조상이나 게으름 탓으로 못 사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가 문제이며 정부가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시킨다.
셋째 날은 농업정책과 농민운동에 대하여 강의와 토론을 하는데, 여기에는 소농과 토지 문제, 농산물 가격 문제, 봉건적인 의식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부락과 지역, 전국 단위로 구분하여 농민운동의 과제와 방법을 토론한다. 후기에 와서는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실제로 투쟁했던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단골로 사례 발표를 한 사람이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던 구례의 최성호였다.
“아카데미 교육이 진짜 교육이었어. 체계적으로 4박 5일, 일주일, 한 달 반 코스로 장기 교육을 하고 또 집에 까지 와서 교육을 했어. 내가 중학교 나왔는데 대학교 경제학까지 공부를 시키는 거야. 어려운 경제학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내용은 금을 긋고, 읽은 소감을 쓰고. 하여튼 그렇게 공부를 해놓으니까 농민운동가로서 이론이나 조직력 같은 걸 통달하게 돼. 그러니까 싸우고 싶지. 구례에서 경지정리 담당하는 농관소하고 싸움이 붙었는데 결국 소장이 우리한테 와서 큰 절하고 잘못했다고 빌었어. 그 때 승리했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최성호가 사례 발표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