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주간동아> 대한민국 설계자들16-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2015.12.23)

<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16>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불같은 성격, 사자 같은 용모의 명연설가…평생 중도노선 지키며 기독교 사회운동에 헌신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1991년 1월 20일 서울 라마다올림피아호텔(현 올림피아호텔 서울)에서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남북문제 세미나에 강원용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과 민자당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정원식 국무총리, 민주당 김대중 공동대표가 나란히 참석했다(왼쪽부터). 동아DB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익환을 제외하면, 한신(韓神) 그룹에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인물은 강원용이다. 김재준은 물론이고 문익환, 안병무 등이 모두 학교(한신대)에 적을 두었다면, 김재준이 키운 또 한 명의 걸출한 제자인 강원용은 학교 바깥에서 일선 목회자이자 탁월한 조직가, 활동가로 활약했다.
강원용이 운영하던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가 1970년대 정권의 탄압 아래서 민주진영 인사들의 피신처가 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 현대지성사에서 한신의 위치를 이야기하려면 한신과 기장(기독교장로회)이 지닌 ‘조직’으로서의 영향력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운데, 강원용이 그 영향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1917년 함남 이원 출생인 강원용은 서른 살도 되기 전인 해방기에 이미 청년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고, 이후 목회를 할 때 탁월한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다. 훗날 김경재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로 강원용을 평했다. “아마 정계로 나갔다면 대통령이 됐거나, 못해도 국무총리는 몇 번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웅변을 잘했고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어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설교였습니다”(김경재의 ‘여해 강원용 목사와 한국사회 속의 교회’). 강원용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을 타고났고 사자 같은 용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북간도 룽징(龍井) 은진중 재학시절, 학생회장이던 강원용은 스승 김재준의 강권과 은진중의 캐나다인 교장의 지원으로 1939년 일본 메이지학원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노조)과 농민조합을 일본에 도입하고 빈민운동을 하던 기독교인 가가와 도요히코를 직접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학병세대에 속하는 강원용은, 학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 돌아와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이 목사로 있던 룽징 중앙교회 전도사로 일하다 해방과 함께 월남했다.
 
통합의 중재자 지향한 강원용

1975년 1월 크리스챤아카데미 중간집단 교육 중 농촌지도자 지도력 개발 과정에서 강의하는 강원용(오른쪽). 사진 제공 ·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WCC의 거물이 되다

일반적으로 강원용이라 하면 흔히 따라 붙는 수식어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 ‘기독교 사회운동의 선구자’ 등이다. 사실 강원용은 한국보다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다. 이렇게 된 데는 강원용의 WCC(세계교회협의회) 활동이 있었다. WCC와의 인연은, 강원용이 뉴욕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한 1954년 미국 에번스턴에서 열린 WCC 2차 총회에 참석하면서 시작됐다. 동서와 남북으로 쪼개진 국제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교파와 교리를 넘어 교회일치운동을 주창하며 시작된 WCC는, 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창립총회 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해야 하며, 또 양극단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런 WCC의 중도 통합 노선이 1950년대 후반 한국 교계에서 월남 보수우익 기독교 세력에 의해 ‘용공주의’로 비난받게 되고, 급기야 WCC 가입 문제로 예수교장로회(예장) 내부에서 ‘통합’(가입파)과 ‘합동’(비가입파)으로 교단이 분열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김경재의 ‘강원용 목사와 에큐메니컬 운동’).
강원용은 1961년 인도 뉴델리 WCC 3차 총회에서 ‘교회와 사회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국제적인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