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해자료관

신앙대담 - 생활 속의 하늘나라

작성일 : 2011.06.29 조회수 : 10

"진행자의 강원용 목사에 대한 소개 : “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당신은 사회개혁가요 아니요, 당신은 성직자요 아니요, 그럼 당신은 누구요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회고록 [빈들에서] 중. 서울의 경동교회의 목사이면서,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설립자요 원장이고, 한국의 기독교 연합회와 세계의 기독교 연합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교회의 일치, 종교 간의 대화, 세계평화, 지구보존에 공헌하는 분으로 지난 생과 사상의 성장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년시절 초기의 신앙 : 함남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이후 교육을 못 받다가 15세에 세례를 받고 애국시인 윤동주와 문동환, 문익환과의 교류를 하게 되고, 이것이 독립과 애국심의 요람이었다. 당시 지독히 보수적이고 율법적이었는데, 70이 넘은 할아버지 강모호 장로님의 영향을 받아 성서의 내용 그대로를 가감없이 믿었다. 한림대의 고범석 박사가 최근 이라는 책에 내가 어릴 적에 문화적 혼재 속에 살았다는 말을 썼는데, 전통적인 유교가정의 종손으로 살았고, 밤에 무당 굿 구경을 많이 다녔고, 외삼촌이 톨스토이와 카가와 도회히코의 숭배자로 사회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들이 나의 어린 시절에 혼재되어 다른 사람과는 좀 달랐었다. 유년기에는 싸움을 즐기는 불량아였고, 중학교 때는 선생 중 엄격한 기독교인으로써의 생활을 않는 사람들을 아홉 명이나 쫒아낼 정도로 엄격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정통주의를 공부한 김제준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이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성서를 가지고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돌아있던 사람이 정상적으로 성서적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의 교류와 신앙의 성장 : 빈민굴 선교에 자기 생애를 바친 카가와 도회히코 선생의 희생적인 이웃사랑을 실제로 보고 강한 영향력을 받았다. 24살에 결혼한 나는 김 목사님 만나기 2 년 전 만해도 제일 친한 친구가 연애하는 것도 죄악이라고 생각해 말리다가 절교를 할 정도였다. 아내는 사마리아사람 형제단 중 한명으로 의료사업에 관심이 있어 세브란스에서 간호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일본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를 위해 주부생활 해줘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 신앙 : 카가와 도회히코, 김제준 목사의 영향을 받아 이웃사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어려운 사람을 일일이 다 도울 수가 없어 고민을 하다가, 1948년에 라이너홀드리버 교수가 제 2차 대전 후에 쓴 책 를 읽고, 도덕적인 개인들이 모인 사회도 도덕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영국인의 예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도덕적인 인간만 만들자고 하는데, 부도덕한 범죄형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고, 다만 인간은 어떻게 믿는 것이 올바르게 믿는 생활이냐 하는 걸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할 때, 수백 명의 거지 중 누굴 돕느냐 고민하고, 내가 가지고 남는 것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돕는다고 생각하는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지 개개인을 돕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니다.
한민족의 미래 : 현재 남북이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는데, 본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이데올로기가 우리 마음을 가두어두게 되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탄과도 손을 잡겠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게 된 것이 두가지 중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 민족만의 문화적 정서, 하나와 조화 그리고 장인정신에 의한 멋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신들을 살리면서 율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과 샤머니즘, 퓨리타니즘 등을 경계하면서 신앙을 바로 세우려 한다면 희망이 있다고 본다."

관련일시

199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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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한인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대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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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한미크리스챤라이프 (LA)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