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너머-총서 3]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 - Belonging to the Universe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프라와 두 가톨릭 수도자와의 대화록!
20년 전, 세계적인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와 두 가톨릭 수도자가 대화를 통해 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했던 책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가 저자와의 정식 계약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대화문화아카데미 사이·너머 총서로 재발간되었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왜 손잡아야 하며,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과학을 무시하는 종교는 절름발이요, 종교를 무시하는 과학은 ‘장님’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과학과 종교의 협력이 중요하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괴와 죽음의 세력에 맞서 함께 싸우는 전우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가 오늘날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변화해가는지, 또 우리가 그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성의 개념, 영적 경험의 본질은 현대과학과 배타적이지 않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의 어딘가에서 허우적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우리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웅장한 생명의 협주곡을 함께 연주하는 중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분자는 이전에 누구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였고, 또 앞으로도 누군가의 몸 혹은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몸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지구상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다시 어딘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의 분자 단위만이 아니라, 내 몸을 꾸려가는 기본 원리도 살아 있는 세상의 모든 나머지와 함께 같은 원리로 돌아가며 함께 호흡한다. 우리는 진정 우주에 속한 존재이며, 이 귀속감을 깨닫는 일은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고 그 깊이를 더해준다. 이 책의 한국어본이 새롭게 출간된다니 정말로 반갑다. 한국에는 다른 종교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지혜를 배우는 놀라운 전통이 있다고 들었다. 한국의 그런 풍토에 이 책도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길, 나아가 한국의 과학과 영성, 한국의 종교에 대해 더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길, 더 풍성한 열매가 맺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프리초프 카프라의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추천글 소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 이 책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진정한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성공 사례이다. 시종 과학과 신학으로 분리되어왔던 각각의 반쪽자리 진리가 어떻게 하나의 온전한 진리로 되살아날 수 있는지 마음 졸이며 보게 된다. 기독교 신학의 역사, 그리고 해방신학을 비롯해 현대신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크게 넓혀주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채수일 한신대 총장 | 과학과 종교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왔다. 변증, 갈등, 무관심 혹은 냉담을 거쳐 대화에 이른 길 위에는 창조론, 진화론, 우주론, 생태학, 뇌 과학, 인지과학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화의 대부분은 서구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동양의 과학 사상과 기술 문명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리초프 카프라만큼 폭넓은 안목으로 접근한 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인 ‘우주에 귀속하기: 과학과 영성에 대한 탐구’라는 본래의 제목처럼 과학이 어떻게 종교의 대전환을 가능케 했는지, 또한 종교가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탐구를 위해 어떤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줄 것이다.
이병남 LG인화원 원장 | 저자들은 종교 없는 영성은 가능하지만 영성 없는 종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또 체험을 통한 영성을 얘기하면서, 그 체험이란 것이 내가 직접 만나는 절대적 존재, 그 실체를 직접 보고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영성 체험을 통해 내 삶을 살아가는 길이 변한다고 말한다. (중략) 영성은 곧 사회적 책임 의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영성의 체험을 통해 나 홀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를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을 만큼 충만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