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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활력화를 위한 한국교회활력화네트워크 회원세미나를 가졌습니다.

 

 

한국교회활력화네트워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발전방안을 찾고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활력화하기 위해 작년 11월 2일 연세대 원두우 신학관에서 창립되었다. 네트워크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대안과 교회론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범교단 목회자들이 참여하는 배움터를 개설할 것이며 교회발전에 실제적으로 유익한 공적인 지원을 추진할 것이다.

 

그 시작으로 2월 26일(월)에 네트워크 회원들을 위한 첫 세미나가 아현감리교회에서 열렸다. 30여명이 참가한 이번 세미나를 위해 연세대 양혁승 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미래사회, 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이에 대해 서울신대의 최형근 교수와 성락교회 지형은 목사가 논찬했다. 4차 산업혁명이 앞으로의 사회와 무엇보다 교회에 미칠 영향을 심도있게 고민하고 토의함으로 회원들의 진지한 반응들로 마무리 되었다.

 

[한국교회활력화지원네트워크 회원세미나 일정표]

2018. 6 원로와의 대화

2018. 9 신학과 인접학문 대화

2018. 11 사회변화와 교회

 

 

편집자 주] 이번 교회활력화네트워크 회원세미나는 아현교회에서 진행됐고 발제 후 논찬과 질문이 이어졌다.그 내용을 전재한다. 

 

논찬

 

 

최형근 교수(서울신대) : 4차 산업혁명에 많이 뒤쳐진 그룹이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교수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기존의 대학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대학은 없어지지는 않겠으나 새로운 유형의 대학이 올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했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존의 전통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이 완벽하게 다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양교수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신 부분, 플랫폼 베이스 처치처럼 새로운 교회가 등장하리라고 봅니다.

 

양교수님은 제일 처음에 성경구절 세 개를 언급을 했습니다. 그 중 우리는 보냄받은 자인데, 우리가 보냄받은 지역은 크게는 세상, 작게는 아파트 단지나 가족입니다. 이 안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보냄받은 세상, 사회 문화적인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오는 결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교회는 이래야 저래야 된다고 이야기할 입장은 아닌 거 같고요. 몇 가지 중요한 화두만 던지고자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원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기독교 신학·신앙과의 연결성으로 본다면 본질적인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심입니다. 즉 몸의 문제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가운데 핵심적인 것인 네트워킹을 양교수님이 언급하셨는데, 그 네트워킹이 요즘의 심리학적으로 뇌과학적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네트워크되고 있는 다양한 뇌세포의 영역까지도 파악될 수 있습니다. 양교수님은 그것을 창조주의 영역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까지도 현대과학이 새로운 분석을 가지고 새로운 제안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해체와 파괴, 그리고 융합. 또 다른 융합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가운데서, 과연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인 성육신. 하나님이 몸을 입고 우리 안에 오셨고, 우리가 몸으로 거한다고 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예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친교를 하는 것이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 받아,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몸으로, 관계로 구현해나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관계가 해체가 되고, 사실 가족의 해체 같은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로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일어나고 있는 missional church같은 운동이라던가, 또는 건강한 교회 운동이라는 것들에 있어서, 저는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가 공간과 시간과 성직제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고 사실 이러한 것들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젊은 세대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주일날 오전에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시간적인 하나의 규정성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하나님께 몸으로 드린다는 그 예배, 롬12장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몸과 영이라고 하는 것, 뇌과학적인 의미로 얘기할 때 영혼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질문할 때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그러한 이분법적이고 삼분법적인 분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본질적인 모습이 삼위하나님의 총체적인 모습이 숫자적인 개념이 아닌 본질적인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의 교회 상황에서 구현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의 변화가 교회의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저출산과 고령화. 가족구조의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경제가, 오이코노메아가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들은 강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또 다른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낼 것인가? 하나님의 정신을 구현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는 신학교육의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현재 한국교회는 젊은이들은 교회에 대한 희망을 접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신대원 입시 지원율,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장신대와 총신대, 얼마전까지만 해도 5:1까지도 했었는데, 올해 광나루장신대는 2:1대로 떨어졌고, 총신대는 1.56:1로 떨어졌습니다. 서울신대는 처음으로 마이너스가 됐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사회문화가 거대한 격변기에 접어들었으며, 한 국가문화의 시스템 가운데 한 자리에 있는 교회도 그 영향권 내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보냄받은 하나님의 교회와 또한 그 교회의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신학교의 패러다임은 과연 어떻게 변화해야할 것인가? 새로운 교회가 온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신학교가 온다고 하는 것도 중요하고, 신학교의 존재이유가 새롭게 정의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 번도 밟아보지 않는 길을 걷는 교회. 이 교회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는 것을 확신하고, 어떤 의미에서 오늘 강의의 핵심 중에 하나인 인간의 욕망,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인간 속에 내재한 탐욕과 수많은 우상숭배를 거부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가져야겠다. 겸손함과 정직함과 단순한 삶의 방식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 반갑습니다 지형은입니다. 4차산업혁명 이런 저런 세미나에서 배웠는데, 오늘 양교수님을 통해 훨씬 더 실감나게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스북을 저도 하는데요. 페이스북이 옛날에 지난 것을 리마인드 시켜주더라고요. 4년전에 제가 올린 것을 오늘 올려졌더라고요. 4년전에 제가 ‘마지막 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더라고요. 오늘 논찬하고 연관이 있어서 읽겠습니다.

 

『마지막 말

 

마지막 말은 다 진지하다 그래서 깊다.

마지막이라는 상황에 특별한 장치가 걸려있을게다.

어느 시점에서 현상의 존재가 끝나는데

.... 어느때 존재의 신비를 묻는다.

.... 내 삶에 가까이 있다가 먼저 떠난 사람들이 남긴 말이 무엇인가?

아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마지막 말에는 어떤 깨달음이 있는가?

언젠가 남길 내 마지막 말에 담길 내 삶의 걸음은 무엇인가?』

 

양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굉장히 위축되고 그랬는데, 4년전에 쓴글을 보면서 용감해졌습니다. ‘그렇지 기술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명제들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술의 발전과 연관해서 돈이 되는데 윤리적인 문제때문에 진행되지 못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커즈와일이라는 사람이 얘기한 singularity, 특이점, 그런 유형은 역사적으로 반복됐습니다. 과학기술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있다고 하는데, 인문학적 관점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있다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역사에서 바로크 시대에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개량되면서 지식이 본격적으로 증폭됐습니다. 그전에 지식을 관리하면 시스템을 벗어나서 백과사전이라는 시스템이 생겨났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진기술이 없었는데, 사진 기술이 생겨날 때 거기서 느끼는 당혹감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는 싱귤라리티 유형은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었다. 현재 4차 산업혁명에서 예견된 싱귤레러티가 인류역사에서 그동안 겪어온 이런 유형하고는 질적으로 어떤 다름이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 정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기술과 종교는 역사적으로 충돌해왔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화해모델을 찾아왔다. 대표적으로 1600년대 지구의 공전, 이것에 대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건이죠. 기독교도 역사적으로 언제나 기술의 발전과 충돌해왔고 얼마지나서 공존의 모델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하나 더 말씀드리면 종교의 진리는 그 종교가 존재하는 그 시대의 기술 상황에 상당부분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종교의 진리자체가 기술 상황과 연관되어있지 않은 본질적인 것인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진리다라고 말하는 범위 안에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그로인해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배운 신학의 틀은 400년전 것입니다. 적어도 종교개혁이후의 것입니다. 양교수님의 말씀 안에서의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데, 인문과학적인 틀은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책에서 보니까 자기가 옛날에 즐겨들었던 노래의 무드를 재현해놓고 그 무드를 느끼며 살아가면 실제적으로 신체가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어떤 목사님께 듣고 제가 옛날 팝송을 들었더니 상당히 행복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게 인류역사에서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타령은 공통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명제는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늘 있었습니다. 역사가 가능한 기본전제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이 역사학의 기본전제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니까 역사라는 것이 가능합니다. 인문이라는 것을 토막글에서 보니까, 문(文)자로 이것은 사람의 마음판 본성을 이야기 한다고 어원을 써본 글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의 발전은 늘 계속해서 발전해가고, 토마스 쿤이라는 학자도 과학기술의 발전자체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계단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틀의 변화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문의 틀은 바뀌지 않는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학도 기본적인 전제가 그것입니다.

 

또하나의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변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체험에서 촉발된다고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종교학적으로 말하는 신체험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신체험, 물론 사람이 신을 체험할 때 뇌파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분석해낼수 있겠지요. 그런데 신체험 자체는 분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17세기 바로크 시대때 화이트 헤드는 1500년 후반이 수학의 위대한 혁명의 시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1600년대에 유럽쪽에서 엄청난 발전이 일어나고 17세기에 파죽적으로 확장이 됩니다. 대략 15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바로크 시대, 이 때가 바로 서구역사에서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진행되는 시대입니다. 과학기술에서는 뉴턴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이 바로크 시대에 우리가 배운 신학에서 이야기한, 종교개혁이후에 일어난 영적인 시대입니다. 17세기는 뉴턴이 존재했지만, 종교개혁의 후예인 경건주의자들과 영적리더들도 존재했던 시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4차산업혁명의 시대인 동시에 영적인 변형이 강렬하게 체험하고 그런 동시대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낙관적인데요, 아까 말씀드린데로 종교와 과학기술이 충돌하지만 어느정도 지나면 화해모델을 발견해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운 종교개혁은 신학쪽으로 배우면서 신학적인 갱신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의 정신사적인 틀이 바뀌는 것과 같이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넓게 종교개혁이후 적어도 16세기, 17세기를 넓게 보면 이러한 인간의 총체적인 정신세계와 같이 맞물려서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우리는 너무 좁게 교회사적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이 기독교 신앙에 영적인 흐름에 잘 조화될 것인가..? 아직까지 누군가 잘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의응답

 

육순종 목사(성북교회) : AI 같은 것이 늘어나다 보면 앞으로 우리의 삶과 충돌할 것인데, 신앙의 영역 종교의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충돌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양혁승 교수(연세대) : 본질적인 측면과 현상적인 측면하고 차이는 있겠지만,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조작은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육순종 목사(성북교회) : 본질과 현상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양혁승 교수(연세대) :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까 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신체험이라고 하는 부분들은 현상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본질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하는 부분은 우리가 현상적으로 그것을 판단하기도 어렵고, 그렇지만 신체험에서 느끼는 감동이라든지, 이런 부분은 질은 다르겠지만 그런 부분들은 뇌의 특정한 부위들을 조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박신진 목사(삼척제일교회) : 제가 오래전에 시골교회에서 탁명환 소장을 모시고 집회를 했다. 그분이 ‘실제로 은혜받은 것처럼, 내가 최면술을 쓸테니 은혜받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집회를 했습니다. 당시에 참여했던 성도들은 마치 부흥회때 보았던 현상같은 것이 일어났다. ‘이런 것이 실제의 거룩 체험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이 주는 떨림과 신비가 성령님이 하시는 일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하는 고민이 듭니다.

 

양혁승 교수(연세대) : 심리적인 현상, 뇌조작으로 일어나는 것은 일종의 쾌락적응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습니다. 마치 마약을 엑스터시현상을 경험하는 것과 닮아있다. 뇌는 그것에 적응을 합니다. 예를 들어 큰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면, 시험에 합격한 순간은 좋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일상화가 됩니다. 이것이 쾌락적응이라는 것인데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이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의미라고 하는 부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오는 것은 그 틀과는 다른 깊이가 있는 그래서 현상적으로 볼 때 그것이 일시적으로 조작으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마 신앙적이나 신학적인 측면에서 삶의 의미를 비롯하여 깊이 있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형근 교수(서울신대)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앞에서 해체와 파괴 단절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본성이란 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가까운 가족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공동체 파괴입니다.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성과 상호성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작적인 기능에서 충족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느꼈다고 하지만 결국 사람들 안에 관계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공통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 탁명환 교수 말씀했지만, 그 부흥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조작으로 느끼기보다는 굉장한 임팩트를 받았을거 같습니다. 목회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해하는 통속적인 종교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상의 차원에서는 구분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꿩잡는게 매죠. 목회현장에서 설교에서 기본적으로 짧든 길든 엑세게제가 들어가야 설교다. 남묘호랭갱교는 일본의 신흥종교로 무지하게 확장된 종교다. 그렇게 된 것은 그 안에 치료현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시대의 틀이 바뀔때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 라는 것에 질문이 나왔습니다. 4차 산업혁명시도에 따라 기독교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다시 나오리라고 봅니다.

 

제 중간 결론은 기독교는 신체험,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는 종교입니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말씀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체험으로 구체적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 역시도 나와야하겠지요..? 수많은 목회자들도 그 정도의 스킬만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흥사들도 스킬을 가르치기는 합니다. 성도들을 담임목사에게 매이게끔 하는 테크닉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하면서 그런 테크닉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은 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진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상적으로는 저는 실제적으로 구분이 안된다라고 봅니다. 거짓과 어둠은 교회 역사적으로 늘 모호함 가운데 있었다. 그래도 어렵더라도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 역사는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최형근 교수(서울신대) :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일상생활에서 신자들이 그렇게 자기들이 교회에서 배운 것들을 철저하게 살려고 했던 부류들이 전도관이나 통일교 같은 이단 사이비입니다. 이들은 조작적인 것들을 통해서 엄청난 효과를 거뒀습니다. 저는 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발전들과 양상들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단과 사이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술들이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채워줄만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서호석 목사(서호석 목사) : 앞으로는 질문을 다 받고 그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답변을 해주시는게 좋겠습니다.

 

김재평 목사님(광동교회) : 요즘 일부에서는 창조냐 진화냐라는 문제에 대해서 싸우는 분이 있습니다. 우종학 교수같은 분입니다. 이분은 창조안에서 진화가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낙관적인 관점에서 기독교 안에서 4차 산업혁명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 본질적인 고민들보다 더 중요한 고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데 본질에만 매달리고 찾는다면, 사회변화에 따른 교회대응은 옹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회현장은 목회자와 교인과의 만남이라는 차원인데, 목회자가 교회를 끌고 가야하는데, 실제적인 목회자는 4차 혁명과 같은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나이브한 식의 사고는 안된다고 본다. 대신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가져야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 ‘글로 했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중에 하나기 때문에 받아야한다.’라는 것이 기본소득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양교수님의 말씀처럼 포퓰리즘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티 기술을 베이스로 깔고 엄청난 부를 싹쓸이 해가는 다국적 기업들이 그들이 가진 것을 세금으로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 기본소득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관으로 보면 합당하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예가 될까 해서요.

 

표나일 목사(삼척중앙교회) : 비트코인 같은 것이 나오는 시대에, 이전까지 기술의 발전에서 종교와 화해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 교회가 포기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작은 교회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 저한테 질문하신거 같은데, 종교단체 교계도 일반사회랑 똑같다고 봅니다. 종교 역시도 종교기득권자에 따라 언제나 얽혀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변화든 변화에는 긍정적인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기득권과 연결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캐노시스 기독론, 이것은 교회가 갱신될 때 늘 반복되고 기억해야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제 생각은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랑 공존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몰락의 길로 갈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최형근 교수(서울신대) : 지역교회라는 것은 플랫폼 베이스 처치의 형태입니다. 교회를 ecological하게 보는 것이고 구속적 관점에서만 함몰되어있던 한국교회를 창조적 관점으로 넘어서게 된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 안에서 승자독식이라는 구조도 교회는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교회됨을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느냐가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한스 큉이 말했듯이 ‘교회는 늘 비본질적인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사회 문화라는 다양한 욕망 속에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본질을 추구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커도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살 것인가?’ 조경태 교수가 쓴 이 책에서 보면 2017년에 35만명의 출산율이었습니다. 100만명 출산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형교회는 가장 오래갈 것입니다. 그것은 대형교회에게 큰 위안일 것입니다. 밑에서 부터 무너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작은 교회가 살아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태계의 본질을 추구해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정치적입니다. 교회는 환경적이고 생태적이라는 작은 교회들이 예배와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는 자기 비움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표나일 목사(삼척중앙교회) : 삼척에서 차를 타고 오면서 큰 건물들을 많이 봤습니다. 예전에 을지로에 백화점이 있을 때 차를 운행해서 사람들을 다 싣고 갔습니다. 지금 시골에서도 큰 교회에서 버스가 신도들을 다 싣고 다닙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갑자기 드는 생각은 공존모델을 말씀하셨는데, 대형교회가 버스를 돌려서 사람들을 안태우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건의 한번 했습니다.

 

서호석 목사(광현교회) : (웃음) 큰 교회 목사님들 잘 들어주시고 끝으로 양교수님께서 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양혁승 교수(연세대) : 본질적인 고민도 던져주시고 실천적인 고민거리도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담론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를 보면서 자꾸 드는 생각은 교회가 일종의 사회적 가치체계 위에서 리드해 가야하는데 오히려 거기에 포획된 상태를 많이 느낍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교회는 마치 자본주의를 수성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서 독점화가 심해진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메카니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배문제에 관하여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기본소득제를 말씀하셨듯이, 정말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것이 아닌 성경적으로 대안적인 측면을 성도들에게 알려줘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대로 된 프레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도 경고음이 나오는데요, SNS 안에서 얼마든지 정치적 조정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지 페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SNS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에 따라서 예측도 또한 조작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민주주의 시스템은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경고음도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종교적 현상의 차원에서 제 소견을 말씀드리면, 현상적으로 우리 인간은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결국 그것은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경이 지향하는 소외되고 약한자들에게 그 삶의 형태로 그것이 나오느냐 우리는 현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서호석 목사(광현교회) : 시간이 길어져 여기서 마무리 해야할거 같습니다. 수고하신 세 분들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